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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희의 위드 디자인] 여행과 창의성에 대한 단상

에스큐브디자인랩 대표


여행은 창의성의 보물 창고다. 직접적 경험이야말로 창의력의 최고 원천이다. 작가들의 여행 사랑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시각 문화를 다루는 디자이너들에게도 새로운 문화, 새로운 공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여행은 최고의 학습이고 디자인 배움터다.

코로나 이후 사람들이 원하는 것 중에 압도적인 1위가 해외여행이라고 한다. 사무실이 있는 부산역 근처도 여행 가방을 끌고 다니는 여행객으로 북적이기 시작하고 있다. 지난 2년 넘게 꾹꾹 눌러놓은 여행을 향한 열망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 시점에 여행을 통해 창의성을 발화했던 사람들을 알게 되

면서 설레었던 보스턴 유학 시절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정선희 위드디자인 여행과 창의성에 대한 단상
정선희 위드디자인 여행과 창의성에 대한 단상

건축 석사과정 1년 차를 마친 나는 보스턴 근교의 회사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어느 날, 로비 입구에 프랭크 게리가인턴했던 곳이라고 적혀 있는 작은 표지를 발견했다. 89년에 이미 프리츠커상을 받았기에, 빌바오의 구겐하임박물관이 막 오픈할 시점인 그때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건축가였다. "게리가 보스턴에 있었단 말이지." 흥미가 생겨 그의 이력을 찾아보다 발견한 사실은, 그가 하버드에서 도시계획

석사 공부를 하다 자퇴했고, 프랑스에서 1년간 건축 일과 여행을 했고, LA로 돌아오자마자 개인 사무실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의 실험적이고, 해체주의적인 건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 경험했을 유럽 건축과 근대 건축물의영향력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유화 수업에서 배우게 된 스페인 바로크를 대표하는 국민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는 20대에 이미 궁정화가가 되었고, 평생을 마드리드에서 살았다. 보스턴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보던 날, 서울대 서양화과를 수석 졸업한 친구는 열정적으로 그가 얼마나 대단한 표현력으로 빛과 색채와 자유로운 붓 터치를 통해 사람과 사물을 그렸는지 설명해 주었다. 그의 전기를 읽어 보며 알게 된 사실은, 벨라스케스는 30세에 1년 반 동안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고, 이탈리아 화가들과 교류하며, 화풍이 변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변화된 새로운 빛과 색채의 사용,표현 방식은 이후 인상주의 화가와 현대의 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보스턴의 공원 구조를 설계한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1822~1903)는 1857년 뉴욕 맨해튼 중심부의 센트럴파크를 디자인했다. 유럽 여행이 그에게 미친 영향력은 더욱 분명하다. 1850년 영국을 여행한 옴스테드는 6개월간의 여행을 바탕으로 '어느 미국 농부의 영국 여행기' (1852)를 썼다. 특히 영국의 공원들을 방문하면서 도심에서의 공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때 받은 충격과 영감으로 센트럴파크를 설계하여 공모전에 당선되었으며, 이후 미국을 대표하는 조경 건축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렇게 알게 된 세 사람의 여행에 공통점이 있다면 자기가 하고 있는 분야에 질문과 호기심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생각과 개념을 찾아내고, 기존에 있던 생각이나 개념들을 새롭게 조합해 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보며 나도 영감과 창조성이 넘치는 여행을 꿈꾸는 시절을 보냈다.

물론 무조건 여행을 한다고 다 창의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여행만이 새로운 눈을 갖게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위험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실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


여행은 문화 공간 사람 만나는 배움터
새 풍경 보는 게 아니라 새 눈 갖는 것
모험과 시도가 창의성으로 가는 길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후, 봉준호 감독은 "새로운 것이 영향력과 파괴력이 큰 것 같습니다. 저는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 게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모험을 하고 시도하는 것을 멈추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디자이너로서 가장 마음에 드는 성공에 대한 정의이다. 창의성으로 가는 길은 모험의 길이고 새로운 시도의 길이다. 진정한 여행을 할 때 경험하게 되는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 그냥 여행이 그리운 것이 아니다. 질문과 호기심 가득했던 여행이 그립다. 새로운 시도를 하게 하는 여행이 그립다. 삶을 고양시키고 변화하게 만드는 여행이 그립다. 나는 지금 나에게 '진정한 여행' 을 원하는지 물어본다. 20대의 호기심과 세상을 향한 질문들을 다시 떠올리며, 정말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 내 자신의 틀을 깨는 용기를 발휘하기를 원하는지 묻는다.

진정한 여행을 떠나고 싶다.


출처: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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